역사를 읽는 방법. 4장 관념사에서의 의미와 이해. 퀜틴 스키너.
퀜틴 스키너 저, 역사를 읽는 방법. 4장 관념사에서의 의미와 이해. 발췌본.
돌베개 출판, 황정아 김용수 역.
저작권법상 문제가 된다면 바로 내릴 테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관념사에서의 의미와 이해.
Meaning and understanding in the history of ideas.
고전적인 이론가들이 명확한 ‘기본 개념들’에 관해 논평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믿음은 관념사 분야를 그토록 오랫동안 엉망으로 만들어온 일련의 혼란과 해석적 부조리를 야기해왔다.
윤리적 혹은 정치적 사유의 활동을 인식하기위해서는 최소한 그런 활동의 사례들 모두를 이어주는 어떤 집단적 유사성이 있어야 하며 또 무엇보다 그런 유사성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에 관해 어떤 사전 견해를 갖지 않고서는 그런 활동이나 사례를 살펴보기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 딜레마가 관념사, 특히 역사가들이 권위 있는 주제들에 관해 고전적인 텍스트들이 말하는 바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과 관련되어 있음은 이제 분명해졌을 것이다. 특히 이질적인 문화의 어떤 저자가 말한 것을 연구하는 일은 그가 이러저러하게 말했음이 분명하다는 우리 자신의 기대와 사전 판단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의 결과로 나오는 딜레마는 우리의 인식과 사유를 조직하고 조정하는 모델과 사전 견해 그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을 결정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명제로 진술될 수 있겠다.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분류해야만 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익숙한 것의 견지에서 분류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적 이해를 증대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놓은 영속적인 위험은, 누군가가 말하거나 행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그 자체로 그 행위자로서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혹은 심지어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을 했다고 이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시도는, 익숙하기 때문에 역사가에게는 본질적으로 과거에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이 은폐되는 패러다임들의 무의식적 적용이 윤리적, 정치적, 종교적, 혹은 그 외의 유사한 사유 방식에 대한 현재의 역사적 연구를 어디까지 오염시키고 있는지 밝히는 과정이 될 것이다. 각각의 고전적인 저자가 말하는 것은 어쩔 도리 없이 다양한 종류의 역사적 부조리함으로 전락할 위험을 무릅쓰게 됨을 여러 방식으로 주장하고, 동시에 그 결과들이 역사라기보다는 신화로 분류되는 것이 적절하다는 점을 분석하려고 한다.
1) 원칙의 신화
각각의 고전적인 저자가 해당 분야를 구성한다고 여겨지는 주제들에 대해 어떤 교리를 진술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
형태들 :
1.1)
고전적인 이론가의 산발적이고 우연적인 발언들을 자신이
기대하는 주제에 관한 ‘교리’로 바꿔버릴 위험.
다양한 방식으로 고전적인 이론가들의 몇몇 산발적이고 우연적인 언급들을 역사가 자신이 찾아내려고 작정한 주제에 관해 남긴 ‘원칙으로 오해하는 것.
①
개별 사상가 혹은 일련의 사상가들에 초점. (지적 전기나, 사상사 개관)
- 저자에게 그가 전달할 의사를 가질 수 없었던 의미를 요령부득하게 귀속시킴. 시대착오적; 주어진 저자는 어떤 우연적인 용어의 유사성 덕분에 그가 원칙적으로 기여할 의사를 가질 수가 없었던 주장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졌다고 ‘발견’된다. 저자가 자신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용어들로 구성된 논의에 기여하고자 했을 수도 있었다는 발상이 지닌 부적절함을
감안하지 않는다.
- 고전적인 텍스트에서 기대하는 원칙을 너무 쉽게 찾아낸다. 해당 저자들이 자신의 공으로 돌려진 그 원칙들을 분명히 표현할 의사가 실제로 있었다면 도대체 왜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후대 역사가로 하여금 추측과 단서를 통해 그들의 의사라는 것을 재구성하도록 만들었겠는가?
②
단위관념 unit
idea 자체의 발전에 초점. (관념사)
어떤 주어진 원칙의 형태론을 ‘그것이 나타나는 역사의 모든 방면에서’ 추적하는 접근.
- 위험: 연구 대상인 원칙을 너무 쉽게 하나의 실체로 만드다. 역사가가 그렇게 특정지어진 관념을 절차에 따라 찾아 나서게 되면 설사 여러 사상가들이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고, 수차 ‘시야에서 놓쳤으며’, 또 설사 시대 전체가 그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해도, 마치 그 원칙의 발전된 형태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역사에 내재해 있었던 것처럼 말하기가 십상이다. 관념이 행위자를 전제한다는 사실은 관념 자체가 스스로를 위한 싸움에 나서면서 쉽사리 사라진다.
- 나중에 나온 원칙들이 그에 앞서서 ‘예견’된 사례를 지적하고 그리하여 개별 저자들의 선견지명을 찬양하는 데 거의 전적으로 몰두하는 형태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역사라는 허울조차 방기되며, 과거의 저자들은 그저 우리 자신이 되는 조건을 얼마나 열망한 듯 보이는가에 따라 칭송 혹은 비난을 받는다.
1.2) 핵심적인 주제에 관해 인식 가능한 원칙을 생각하는 데 실패한 고전적인 이론가는 합당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비판받는다.
고전적인 이론가들에게 그들의 주제에 적절하다고 합의된, 그러나 그들 자신은 무슨 이유에선지
논의하지 못했던 원칙을 부여하는 것이다. 무해한 역사적 추론을 가장하여 자신의 편견을 가장 카리스마
있는 이름들에 고착시키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실상 죽은 자들을 가지고 노는 장난이
된다.
해당 이론가가 언급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어떤 원칙을 포착한 다음 언급하지 못한
무능함을 두고 그를 비판.
-
어떤 저작을 내놓았든 간에 해당 분야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체계적인 기여를 할 의도로 그것을 썼다는 선험적 가정에 근거하여 고전적 저자들을 비판.
하지만 이 신화의 역전된 형태와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온갖 추정된 실패들에 있어서도 여전히 우리가 자초한 동일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즉, 이들 저자 중의 누구라도 그가 하지 못했다고 비난받는
그 일을 애초에 할 의사가 있었는가, 혹은 그럴 의사가 있을 수나 있었겠는가?
2) 일관성의 신화.
고전적인 저자들 중 일부는 일관성이 떨어지거나 심지어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 어떤 체계적인 설명도 내놓지 못할 수가 있다. 하지만 연구활동의 패러다임은 해당 분야에서 가장 특징적인 주제들에 대한 고전적인 저자들의 원칙을 규명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왔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역사가가 이 텍스트들에 그것들이 결핍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관성을 제공하려는 것을 자신의 임무라고 여길 위험이 커진다. 그런 위험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어떤 작업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서 원래의 강조점과 어조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나 그 결과로 추출 가능하거나 상대적으로 쉽게 전달 가능한 메시지를 찾고 싶은 유혹 때문에 한층 악화된다.
이들에게 목표는 항상 ‘하나의 단일한 해석’에 ‘도달’하고 ‘저자의 체계에 관한 일관된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주요 철학자들의 사상에 그것들이 한번도 획득하지 못했거나 심지어 획득할 열망도 없었을지 모르는 일관성과 일반적으로 완결된 체제라는 인상을 부여한다.
이 일관성의 신화는 가장 경멸적인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라고 부를 수 잇는 두 방향으로 전개.
① 최대치의 일관성을 가진 메시지를 추출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는 저자의 진술을 무시하거나 그의 사유체계의 일관성을 손상하는 듯 보이는 저작들 전부를 무시해도 괜찮다는 가정.
②
고전적인 텍스트들이 해석자가 드러낼 의무가 있는 어떤
‘내적 일관성’을 갖고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으므로, 명백한 모순으로 말미암아 이런 드러냄을 막고 있는 장애물들은 실제 모순일 수 없기에 실제 장애물도 될 수가
없다. 주어진 저자가 일관성이 없는가가 아니라 그의 모순(혹은
모순을 보이는 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를 골몰. 양립
불가능성은 그렇듯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놓아두어서는 안 되고, ‘전체 이론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로 향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하며, 이런 전체에서 모순들은
분명 승화되지 않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 이율배반 해소하기라는 학문적 길. 레오 스트라우스.
박해 시기 동안에는 덜 전통적인 믿음들을 출판된 저작의 행간에 숨길 필요가 있다. 유능한
저자는 겉으로 드러난 견해에서 스스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므로 이 드러난 모순들이 ‘신뢰할 만한 지적인’ 독자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처럼 보이는 정통 견해에
실제로는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호로서 의도적으로 심어졌을 가능성을 ‘합당하게 의심’
선험적
가정 : 1) 연국의 방향은 독창적인 것이 곧 전복적이란 가정. 어떤
텍스트에서 행간의 원칙을 찾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2)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은 부주의한 독자’라는 사실에 힘입어 어떤 해석이든 행간 읽기에 토대를 둔 것이라면 사실상 비평으로부터 면제된다. 행간 메시지를 못 보면 생각이 모자란 것이고, 보면 신뢰할 만하고
지적.
이런 주장은 동어반복적. 어떤 시기가 박해시기이고 행간 독해가 필요로 되는가?
3) 예기의 신화
특정 텍스트가 우리에게 갖는 중요성을 고려할 때, 우선 그 저작이나 그것이 갖고 있다는 현재성을 저자의 의도와 의미에 대한 분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방식. 주어진 에피스드가 그 당시에 행위자에게 가졌던 의미보다 현재로부터 소급된 중요성에 더 관심을 기울일 때 발생하기 쉬운 신화.
- 목적론적 설명이 범할 수 있는 거칠기 짝이 없는 비평 허용, 사건이란 미래에 가서야 그 의미가 알려질 수 있다는 식.
관념사 저술 편협성의 두 가지 형태
① 어떤 진술의 분명한 지시내용 기술하면서 자신의 이점 오용.
영향력 개념 적용을 위한 충분 조건 혹은 최소한 필요조건 충족 고려하지 않은 채 외관상 설명의 방식으로 이 개념을 쉽게 사용할 위험. 1) 연구했나? 2) 다른 저자 영향? 3) 독자적 도달 불가?
② 평자들이 주어진 저작의 의미를 기술하면서 자신들의 이점 오용.
역사가가 어떤 논의에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잘못된 익숙함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개념화할 위험 언제나 존재.
일반적 고려, 방법론적 교훈
1. 어떤 행위자도 그가 의도했거나 성취한 것에 대한 올바른 설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의도했거나 성취했다고 설명될 수 없다는 점. 이처럼 행위자가 그 자신의 의도에 특별한 권위를 갖는다는 사실은 관찰자가 행위자의 행동에 대해 그 행위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충실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할 위치에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정신 분석학) 그러나 행위자의 행동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행위자에게는 가능하지 않았던 묘사와 분류 기준이 이용에 의존한다는 것을 드러나고도 계속해서 납득할 만한 것으로 성립할 가능성은 배제한다.
- 행위자의 의도에 대한 신빙성 있는 설명은 반드시 그 행위자가 원칙적으로 자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묘사하고 분류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는 진술의 범위 안에 있어야 하며, 그 범위 안의 진술을 활용해야 한다.
2. 어떤 행위자가 특정 행동을 수행할 의사가 있을 수도 있었고 또 실제로 있었다는 점을 먼저 밝히지지 않는다면, 그 행동을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 행위자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다.
3.
사유활동 그 자체.
사유가 노력이 필요한 활동이지 단순히 변화무쌍한 정신적 이미지를 조작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 통상의
자기성찰과 관찰을 통해 문제들을 끝까지 사유하려는 시도는 유형화되거나 심지어 균일화된 목적을 지닌 활동의 형태를 띠지 않으며 또 그것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주 말과 의미를 붙들고 견디기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하고 지성의 한계를 벗어나
일관된 원칙만큼이나 많은 개념적 혼란을 드러낸다는 점을 깨닫는다.
말한 것과 말로 행한 것.
각각의 고전적인 텍스트 저자가 공인된 정전급 원칙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초점을 두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작업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 찾아내는 접근이 가지는 위험은 충분한 주의와 학식이 갖취져도 피할 수 없다. 이런 접근법에 내재적인 잘못.
원칙적으로 사상사에서 연구하는 텍스트의 적절한 이해에 도달하게 해주지 못한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런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말해진 것의 의미에 대한 설명만이 아니라 해당 저자가 그런 말을 함으로써 담아낸 의미에 대한 설명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1) 용어의 의미가 시간이 지나면서 때로 변하고 따라서 어떤 저자가 주어진 개념에 관해 말한 것에 대한 설명도 그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잠재적으로 잘못된 지침일 수 있다.
저자들이 때로 의도적으로 2) 완곡한 수사 전략이라 부를만한 것을 채택하기 때문. 말한 바와 의미한 바가 분리.
주어진 저자가 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쓰는 바를 믿었다’고 보는 것이 과연 ‘역사적으로 더 신빈성이 있는지’에 관해 의심을 품을 몇 가지 이유.
충고받은 대로 그런 텍스트를 아무리 거듭거듭 읽는다 해도 이와 같은 경우에 어떻게 말해진 바에서 의미한 바에 대한 이해로 옮겨갈 수 있는지는 알기 힘들다. 그들의 텍스트가 그들이 말한 바를 의미하는지가 미심쩍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 이유는 텍스트 자체를 넘어선 정보 때문일 것이다.
어떤 진지한 발언의 경우라도 누군가 한 말을 연구하는 것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충분한 지침이 결코 될 수 없다. 즉, 사람들이 말하는 것뿐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행하는 것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쓴 것에 대한 역사적 이해.
John Langshaw Austin.
행하는 것에 관해 물으면, 개별 텍스트와 ‘단위 관념’의 연구에 어떤 차이가 생기는가?
Ex) 데카르트 성찰, 단순 인식론자?
어떤 특정한 문제(16세기 후기에 고대의 극단적 회의론 텍스트 재발견, 파급.) 해결하기 위해 확실성의 원칙을 하나의 답으로 의도했던 것.
왜 이 텍스트가 이런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되었는지, 왜 특정 어휘가 배치되었는지, 왜 특정 논의가 유독 선별되고 강조되었는지, 전체적으로 왜 이 텍스트가 그 고유성과 형태를 갖는지 새롭게 사유 가능.
EX) 러브 조이. Nobilitas 높은 평가받는 도덕적 자질 // 특정 사회 계급 소속. 모호함이 의도적으로 구사될 가능성. 다행스러운 일치 보편적 지적.
‘단위 관념’의 역사 기획에 내재된 두 가지 약점.
1) 특정 시기 특정 문화에서 주어진 관념을 이해하는 일조차도 러브조이식으로 그것이 표현되는 견지를 이해하는 데만 집중할 수는 없다. 다양하고 양립 불가능한 의도에서 사용되기 십상. 발언의 맥락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더라도 반드시 어려움이 해소되리라 기대할 수는 없는데, 이런 맥락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 오히려 해당 단어가 사용되는 온갖 다양한 맥락들을 연구해야 할 것이며 그것이 하는 온갖 기능 연구해야.
2)
그와 같은 역사를 쓸 때, 서사가 진술 주체인 행위자와 맺는 관계가 거의 즉각 끊어진다. 그
표현이 어떤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어떤 이유에서 그 표현을 계속 채택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어떤 저자들이 기여한 어떤 확정된 관념이란 없고 단지 여러 다른 행위자들이 여러 다른 의도로 작성한 여러 다른 진술들이 있음 뿐임을
아는 순간, 쓰여져야 할 관념사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관념의
다양한 용법에 관한 역사, 관념이 사용된 다양한 의도들의 역사가 있을 따름이다. (논리 확장… 우오…)
일단 저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함으로써 무엇을 행한 것인지에 관해 대답해야할 질문이 있다는 걸 알고 나면, 더 이상 단위 관념들을 추적하거나 영속적인 사안들에 관해 개별 저자가 한 말에 초점을 두고 역사를 구성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서구의 도덕 사회 정치 철학에 오래 지속되어온 것들이 있으며 이것들이 다수의 핵심 개념과 논의 양식의 안정된 채택에 반영되어 왔음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지속성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역사를 구성함으로써 중국에는 가령 ‘정당한 국가의 성격’에 관한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홉스, 마르크스의 관점을 늘어놓고 비교하는 식의 연구를 계속하는 결과를 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비판해온 접근법은 특정 논의들을 그것들이 발생한 맥락에서 추상화하여 영속적인 논쟁이라는 것에 대한 ‘기여’로 재배치하는 일 포함.
써야할 유일한 관념사는 해당 관념의 용법의 역사다.
맥락의 이해와 관념사의 가치.
관념사를 연구하는 데 적합한 방법론.
텍스트의 이해는 그것이 무슨 의미로 의도되었으며 어떤 식으로 그런 의미를 갖도록 의도되었는지에 관한 파악을 전제한다. 의도적인 소통행위로서의 텍스트는 이런 것들을 체현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쓸 당시에 저자가 그와 같은 발언들을 내놓음으로써 실제로 어떤 것을 전달하려고 의도했는가
주어진 경우에 해당 발언을 내놓음으로써 관습적으로 수행되었을 소통의 범위 전체 그려보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더 광범위한 언어적 맥락과 해당 발언의 관계를 추적.
본질상 언어적, 적합한 방법론은 의도의 발견과 관련. 언어학적 작업.
사회적 맥락은, 원칙적으로 누군가 전달하고자 의도했을 법한 관습적인 이해 가능한 의미들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필요한 궁극적 틀로서 중요하다.
철학적 분석과 역사적 증거 간의 대화 가능성.
강력한 통시적 접근을 택할 경우에 잘 조명할 수 잇는 주제로는 특히, 개념적 혁신 현상, 그리고 언어의 변화와 이데올로기의 변화 간의 관계.
모든 진술은 불가피하게 특정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특정한 계기의 특정한 의도를 구현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둘러싼 맥락에 특유하므로 그런 맥락을 초월하겠다는 것은 모자랄 정도로 단순한 일이 될 뿐이다.
철학에는 어떤 영속적인 문제도 없다. 개별적인 질문에 대한 개별적인 답변만이 있을 뿐이며, 철학사에서 직접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기보다 우리 스스로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관념사 연구의 철학적 가치 : 고전적인 텍스트가 그것 자체의 문제들을 다루지 꼭 우리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자체가 그것에 ‘당면 과제와의 관련성’과 현재적인 철학의 중요성을 부여해준다. 본질적 동일성이 아니라 다양한 실질적인 도덕적 가정들과 정치적 신념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 근본적인 사안들을 둘러싼 역사적 차이들은 그저 의도와 관습의 차이를 반영할 뿐이지 하나의 가치 공동체의 지배권을 놓고 벌이는 경쟁이 아니며 절대정신의 인식의 진화 같은 것은 더구나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시대를 초월한 진리로 받아들이기 쉬운 우리 자신의 방식의 특징들이 우리의 특정한 역사와 사회구조가 지닌 우연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음.
우리 자신의 사회가 우리의 상상력에 부지불식의 제약을 가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그렇다면 이런 제약들에 한계를 가하는 필수불가결하고 대체 불가능한 수단으로서 다른 사회의 믿음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도 하나의 상식이 될 자격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 관념사를 처분해야 할 이유로 흔히 제시되는, 관념사가 ‘진부한 형이상학적인 개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무섭도록 편협한 주장은 오히려 이 역사가 조잡한 교훈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기인식의 교훈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될 만큼 ‘현재성이’ 있다고 간주해야 할 근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즉가적인 문제들이 대한 답을 사상사에 요구하는 것은 방법론적 오류를 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덕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다른 무엇으로부터는 절대로 배울 수 없는, 필연적인 것과 우리 자신의 고유한 방식이 낳은 우연적 산물 간의 구분을 과거로부터 배우는 일은 자기인식에 도달하는 열쇠 하나를 알게 된 것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