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전체주의의와 정치적 자유의 의미 - 이진우 (발췌문)

by 알키비토 2016. 7. 19. 12:32

본문

전체주의의 기원1.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다음은 한길사에서 나온 전체주의의 기원 1편을 옮기신 이진우 씨가 쓰신 전체주의와 '정치적 자유의 의미라는 글을 발췌한 것입니다. 



1.    전체주의는 사라졌는가

전체주의 지배는 시민의 자유를 축소하거나 기본적인 자유를 말살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제한된 지식에 의하면 전체주의는 인간의 마음에서 자유에 대한 사랑을 뿌리뽑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모든 자유의 전제가 되는 단 하나의 본질적인 필수조건, 즉 공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운동 역량을 파괴한 것이다.”

전체주의의 불가해성

 

정치와 자유를 본질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정치적 자유에 관한 물음을 제기.

전체주의는 단순한 폭정과 전제정치 이상의 것. 그것을 가능케하는 전제조건들을 탐색.

 

전체주의가 정치적 자유의 근본적 부정이라고 한다면, “정치란 무엇인가?” 전체주의가 정치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정치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정치는 여전히 의미를 갖고 있는가?”

 

전체주의에 대한 시대 비판적 성찰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정치 혐오를 설명해줄 수 있다. 정치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이 보편화된다면, 즉 정치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심화된다면 우리의 자유 역시도 위험해진다. 정치적 자유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본다면, 전체주의는 결코 끝난 문제가 아니다. “요소로서 존재.

 

정치의 의미는 자유이다.

[1]전체주의가 우리 사회를 총체적으로 정치화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파괴했다면, 전체주의 이후의 현대사회는 정치 자체를 진부하게 만듦으로써 자유의 문제를 왜곡시킨다. 아렌트는 정치와 자유를 분리시키는 사회적, 역사적 조건들을 전체주의의 요소로 파악했던 것이다.

 

2.    아렌트의 삶과 사상: 전체주의와의 대결

아렌트는 현실에 관해 어떤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본질적인 문제를 성찰한다면 현실은 결코 있는 그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반유대주의와 관련된 저항정신

 

3.    절대 악과 자유의 파괴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서양에서 그것도 계몽주의가 꽃을 피웠던 서양에서 발생하게 된 배경을 역사적으로 서술한다.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서술은 우리에게 자유와 정치적 행위의 의미를 밝혀준다.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가 전체주의의 전조

 

그러나 일반적 역사가와 정치철학자들처럼 전체주의의 생성과 그 체제를 단계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 현상을 이해”. 다른 전체주의 이론과 아렌트의 차이는 홀로코스트, 즉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에 있다.

 

전체주의 정권이 왜 그리고 현대에서 가능해진 것인가?

 

전체주의 정권이 만행을 가져온 것이 옛 정치였다면, 그녀가 구상한 새로운 정치는 전체주의를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새로운 정치의 단초와 가능성을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치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에서 모든 종말은 반드시 새로운 시작을 포함하고 있다는 진리도 그대로 유효하다. 이 시작은 끝이 줄 수 있는 약속이며 유일한 메시지이다. 시작은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되기 전에,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이다. 정치적으로 시작은 인간의 자유와 동일한 것이다. 시작이 있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작 beginning, Anfang)

 

마치 하나의 기적처럼 새로운 시작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야만 되는 상황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과정에서 전체주의 정권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때, 그것은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악이 된다. 절대 악은 이기심, 탐욕, 시기, 적개심, 권력욕이나 비겁함 같은 사악한 동기로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로도 복수할 수 없고 사랑으로도 참을 수 없으며 우정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 죽음의 공장이나 망각의 구멍 속에 있는 희생자들이 사형집행자들의 눈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처럼, 이 최신종 범죄자들은 인간에게 모두 죄가 있다는 의식 하에 우리가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 있다."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는 전체주의의 유일한 결정적 원인이 아니다. “사건은 자신의 과거를 밝혀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과거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    잉여존재의 출현과 폭민의 정권

아렌트는 인간의 행위와 자유를 동일시 한다. 정의가 고대, 자유가 근대? 그러나 아렌트는 인간학적 관점에서 자유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동시에 발생했다고 말한다. 탄생은 근원적 의미에서의 자유 행위 그 자체. 인간은 그러나 신처럼 완전히 자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와 행위는 다른 사람의 존재, 다원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유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유를 실천하는 생활방식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위를 하면서 정체성을 획득하고,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고 확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간다.

 

서양문명의 토대를 파괴하는 정치적 현상의 출현을 바라보는 아렌트의 단호함과 일관성.

                           

전체주의를 가능하게 만든 핵심적 요소는 당시 근대사회에 만연했던 쓸모없는 존재(superflousness)”의 경험이었다. 이 경험은 근대 국민국가가 몰락하고 현대적 대중사회가 출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전체주의를 계급사회의 붕괴에 관한 서술로 시작. 전체주의 운동을 구성하는 대중들은 정당이나 조합과 같은 확고한 조직에 소속되지 않고 표류하는 모래처럼 사회를 떠다닌다. “조직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는 대중, 절망적이고 증오로 가득한 개인들의 대중이 생겨난 것.

이처럼 사회적으로 분리되고 원자화되고 그래서 지도자에게서 구원을 기대하는 대중을 둘러싼 전체주의적 운동이다.

인간의 행위 역시 정치적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유의 운동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인간의 운동은 자유에 기여할 수도 있고 자유의 가능성을 파괴할 수도 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적 운동에서는 궁극적으로 운동만이 지속될 뿐 엄밀한 의미에서는 지도자도 대중도 독립적 인격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전체주의의 핵심적 목표는 대중의 운동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이 전체주의적 운동을 통해서만 모든 개인이 총체적으로 지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정권은 대중을 통솔하고 끝까지 대중의 지지에 의존한다. 대중을 움직이는 운동에는 이처럼 항상 전체주의적 요소가 숨겨져 있다. 그렇다면 대중의 운동이 왜 전체주의 정권을 가져왔으며 또 전체주의 정권은 어떻게 대중을 조직하는가? 아렌트는 이 물음에 간단하게 대답한다. 전체주의 정권은 개인을 쓸모없는 잉여존재로 만드는 정치적 도구와 장치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아렌트는 폭민(mob; 조직되지 않는 거대한 폭력적 군중)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폭민은 기존의 사회계급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발생했으며 계급과 국가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 조직되지 않은 잉여 집단이다. 자본주의는 잉여자본과 잉여 인간을 발생시켰는데, 제국주의가 잉여자본의 조직이라면 전체주의는 잉여 인간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폭민은 성장하는 산업 노동자와도 또 더욱 분명하게는 국민 전체와도 동일시 될 수 없으며, 실제로 모든 계급의 폐물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조직하여 공허한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여할 지도자를 기다린다.

[2]전체주의는 간단히 말해 폭민의 정권이다. “인간을 무용지물로 만드려는 전체주의의 시도는 과잉 인구로 시달리는 지구에서 자신들이 별 쓸모없다는 것을 알게 된 현대 대중의 경험을 반영한다.” 전체주의 정권은 이들에게 개인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대신 역사적 운동의 주체라는 허위의식을 심어준다. 그들은 거대한 운동에 기여한다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희생한다.

전체주의 정권은 무한히 많고 다양한 인간들을 마치 모든 인간이 하나의 개인인 것처럼 조직한다. 인간의 세계를 구성하는 복수의 다원성은 사라지고 단수의 획일성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행위 대신 반응을 할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양성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면 언제든지 전체주의가 태동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5.    전체주의는 반복될 수 있다.

[3]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운동에 쉽게 감염되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실존조건인 자유에 관해 깊이 성찰하라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실업, 인구과잉, 사회적 아노미, 정치적 불안, 개인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전체주의적 해결방식에 대한 유혹을 부추긴다.

우리가 전체주의를 이해해야 할 이론적 이유는 전체주의가 인간의 조건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현실과 화해하려면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줄 때에만 인간적이다.

[4]다원주의적 민주주의. “복수의 사람인간 자유에 대한 성찰.

세계화라는 자본시장의 운동, 정보화라는 기술문명의 운동, 생명복제라는 생명공학의 운동이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지금 전체주의에 관한 아렌트의 말은 성찰의 시금석이 된다.

 

자유는 인간이 새로 태어나고 그래서 각자는 새로운 시작이며 어떤 의미에서 세상이 새롭게 시작한다는 사실과 동일하다. 전체주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은 높은 힘을 성가시게 훼방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연 운동 또는 역사 운동의 순종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테러는 그 과정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에서의 자유뿐만 아니라 자유의 근원, 즉 인간이 탄생한다는 사실과 함께 주어져 있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속에 존재하는 자유의 근원을 제거해야 한다.”



[1] *이 점은 정말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 혐오를 정치로서 표현되는 자유 실현의 길을 방해하는 전체주의적 요소로 규정한 사실은 유의미해 보인다.  

 

[2] 소련과 나치독일을 한 데 묶은 사고관의 오류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근대의 사회운동 자체를 전체주의적이라고 낙인 찍는 데서 오는 손실은 계산한 것일까? 결과적으로의 손실은 그렇다쳐도 개념적으로 정말 전반적 사회운동이 모두 나치 시대의 대중 지지와 동일한 성질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도 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근다고 장이 곧 구더기는 아니란 말씀

[3] 이 말도 참 애매하다. 소규모의 동등한 여러 집단에 확실히 속하란 것인가? 이것도 소규모의 여러 집단 중 하나는 힘을 가질 리 없기에 정치적 세력화가 되긴 글렀다만원하는 게 있다면 그럼 ㅋㅋ 정치를 하지 말란 말이냐? 성찰 ㅋ

[4] 아이고 배야 내가 이런 말 할 줄 알았지.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