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거나 새로운 내용이랄 것이란 건 단 한 줄도 없으나, 철저하게 텍스트에 있는 개념을 논리적으로 전개한 글.
문장도 빼어나고 단어 선택을 참 잘하신 것 같다. 대다네...
홉스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을 개괄하고, 그 중 홉스의 국가론이 자연법론 연장선상이라거나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하거나, 전체주의의 맹아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텍스트를 꼼꼼히 읽지 않아, 개인과 국가 혹은 절대주권자와 시민 저항권 사이에 홉스가 구상한 섬세한 긴장 관계를 포착하는데 실패한 이들이라고 비판하는 것 같다. 나는 전적으로 이런 해석에 동의한다.
반- 자유주의. 홉스의 자연법을 인간의 자기보존(단순 생존 뿐만 아니라 권력, 명예 존엄, 경제저 부 포함) 및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법 사상 혹은 기독교 신학과는 구별된다. 이 자연법 개념 때문에 인간과 구별되는 혹은 인간을 연원으로 삼지 않는 질서를 완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질료로 한 질서의 창조 가능성을 긍정하게 되며, 주권에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 (non veritas, sed auctoritas facit legem)" 라는 문구로 축약되는 논리로 국가를 탈신비화 disenchent 한다. 그의 저작에서 밝힌 국가 법률의 개념을 환기하여, 그가 리바이어던 즉 국가의 연원으로 삼은 개인이 개인과 또 국가와 어떤 계약을 맺는가를 밝힌다.
실정법률 이외에 이 법률의 정당성을 판단할 기준으로 "생명"을 일종의 규칙으로 인정하는듯 하게 보이지만, "생명이라는 전제의 절대성은 옳을지 몰라도, 그로부터 법률의 제한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반- 국가주의. 국가는 결코 독립된 실체 Substanz 가 아니라 특정한 기능 Funktion으로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한성) 개념상 칼 슈미트의 말처럼 "국가는 평화보장이라는 기능을 이행하지 않으면, 다시 자연상태가 지배하고 더 이상 국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법률이 법률로서 존재하려면 저항 및 자연상태로서의 인간은 권리를 전면 포기해 국가에 양도해야 하므로, 순서상 "법률에 대한" 저항권은 존재의 근거가 사라진다.
아래는 내가 한 발췌.
<개인주의적 절대주의 - 토마스 홉스의 국가철학과 법철학에 관하여> 윤재왕
서론
"어떻게 사회적 질서가 가능한가?" Talcott Parsons.<The Structure of Social Action>
최초 토마스 홉스.
미래, 주체로서의 개인, 규범적 (재)구성 그리고 질서의 정당화.
근대 이전 사유 형태, 과거 지향, 전통 혹은 현존 질서에서 현재 정당성 확인 집중. 이에 질서는 이미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만들어야 할 그 무엇으로 바뀌고, 무엇인가를 만드는 주체로서의 개인 또한 탄생. 법 역시 그것이 지배할 근거를 제시할 의무를 부담. 동시에 정치적 지배에 대해서도 그 법적 근거를 문제 삼을 수 있는 동기 마련. 즉, 법의 지배 근거와 지배의 법적 근거는 사회적 질서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과 직결되는 물음으로 정착하게 된다.
질서의 정당성은 규범을 통해 구성해야 할 대상이 되고, 그 구성의 주체는 곧 개인이 된다. (이게 사회와 어떤 관계를 가진 개인 모델을 염두한 말이지?)
홉스는 지배와 주권적 권력의 정당성 문제를 명시적으로 법의 문제로 파악한 최초의 학자였다. Hasso Hofmann, Legitimität und Rechtsgeltung, 1977.
홉스에 대한 평가.
절대주의자 홉스 Helmut Schelsky, <Thomas Hobbes - ein politisches Leben> 1981.
법치국가의 설립자 홉스 ans Ryffel, Rechts - und Staatsphilosophe - Philosophische Anthropologie des Politischen 1969
전체주의의 설립자 한나 아렌트, Elemente und Ursprünge totaler Herrschaft, 1986,
Helmut Schelsky, “Die Totalität des Staates bei Hobbes” in Archiv für Rechts und Sozialphilosophie
자유주의자 홉스 칼 슈미트 Leviathan in der staatslehre des Thomas Hobbes, 1938, Neudruck, 2002.
자연법론 연장선상 Alfred Edward Taylor <The Ethical Doctrine of Hobbes> 도덕적 신학적 자연법론자. Howard Warrender <The Political Philosophy of Hobbes> 1957 “테일러- 워렌더- 테제” (Taylor Warrender thesis)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Kritik der naturrechtlichen Interpretation der politischen Philisophie Hobbes>
최초의 법실증주의자 Wolfgang Kersting <Hobbes zur Einführung> 2002.
이 글이 다시 홉스 읽기 시도하는 이유
민주적 헌법국가를 공동체 질서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우리에게 홉스의 사상을 법철학과 국가철학의 관점에서 다시 음미. 타당성 검토, 개념사 Begriffsgeschichte
사상사적 중요성. 시대구분 관점에서 혁명적 폭발력. 문헌 양 불충분.
홉스의 법철학과 국가철학에 관한 기존의 연구가 홉스를 자연법론자로 보거나 절대주의적 요소를 희석시켜 해석하는 반면, 이 글은 최대한 텍스트와의 근접성을 유지하면서 홉스에 대한 그와 같은 ‘우호적’ 해석이 텍스트 자체에 기초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
자연상태과 자연법 그리고 이를 ‘극복’한 리바이어던상태를 설명.
이미 홉스의 자연법개념 자체가 국가상태에서의 주권자를 제약할 수 있는 원리로 작동할 수 없는 근거를 밝히는 것.
홉스 읽기에서 여전히 쟁점이 되고 있는 법치국가, 법실증주의, 저항권의 인정 여부 그리고 전체 이론 체계에서 죄형법정주의가 갖는 위상에 관련된 내용을 최근의 논쟁에 비추어 고찰해보는 작업은 별도의 논문에 답기로 한다.
2. 홉스의 자연(법) 개념
홉스의 저작의 혁명성. 당시 지배적 철학 전통 비교.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결합. 인간은 신의 의지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이자, 신의 창조계획의 매게채에 불과. 개인들의 통일성은 가족, 공동체, 신분, 국가, 교회 등 현시에 대한 신의 지배를 가시적으로 구현하는 제도들을 통해 보장되고, 개인은 그저 전체의 연관성을 보장하는 신의 이성에 참여하면 그만이다.
홉스도 이러한 도덕적 이성이 갖는 구속력과 통합력을 확신했다. 이러한 설명은 홉스 철학 역시 중세의 종교질서와 그 토대인 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과연 홉스의 이론, 특히 법과 국가에 관한 이론이 도덕적 의무를 중심으로 하는 고전적 자연법 전통의 연장에 불과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 고전적 자연법론에서는 인간의 본성(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잠재성과 현재성, 본질과 실존 사이의 수직적 긴장관계 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에 반해 홉스의 철학에서는 이런 긴장이 사라지거나, 긴장을 수직적인 방향에서 수평적인 방샹으로 전환하게 된다. [질서와 관련된 이러한 의미론 Semantik 의 변화는 중세의 사슬에서 벗어난 16세기 정신사의 뚜렷한 특성이었다. Niklas Luhmann “Die Theorie der Ordnung und die natürliche Rechte.” 1984.
홉스에게 자연법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처럼 정치공동체 내에서 인간의 본성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명과 육체를 최대한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요청일 뿐. 홉스가 말하는 자연법은 고전적 자연법에서처럼 영원하고, 객관적으로 타당하며, 인간에 앞서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질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보존과 자기이익에 지향된 합리적 계산으로서의 이성일 뿐. 단어만 전통과 공유, 내용은 정반대.
홉스에 따르면 이러한 자연법은 보편적인 평화상태에서 가장 적절하게 실현될 수 있으며, 이 상태에서 비로소 자연법은 강제력이 없으며, 어떠한 경우에나 효력을 갖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평화를 추구해야할 의무가 있지만, 평화를 달성할 희망이 있을 때에만 그 의무는 구속력을 갖는다. 최상의 자연법은 자기보존을 위한 노력이지, 평화와 통일성을 향한 노력이 아니다. 만일 이 기본법을 준수하기 보다는 위반하는 것이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고, 손해를 더 줄일 것으로 예상할 수만 있다면 의식적으로 이 기본법을 무시해버릴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다. 따라서 자연법의 준칙에 대한 인식이 곧 그 실천까지 포함하지는 않는다. 이성은 모든 사람의 ‘내면의 법정(in foro interno)’ 즉 양심에 대해 구속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적 이성은 너무 박약하고 불확실해서 외적인 행위를 조종할 만한 강제력을 갖고 있지 않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홉스는 고대 이후의 전통적인 이론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자연상태론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자연을 존재가 본질을 향해 움직이는 목적론적 운동으로 이해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서 자연상태와 국가는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정치공동체 (koinoia politike)’ 속에서만 비로소 공동체를 지향하는 인간의 본질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홉스에서는 자연상태와 사회 사이의 동일성은 완전히 파괴된다. 물론 홉스 역시 인간이란 타고날 때부터 지속적인 고립을 견디기 어려워하며, 그 때문에 다른 사람과 연대할 기회를 찾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는 사회를 형성한 능력을 갖지 못하며 (ad societatem ineptos natos esse) 대다수 인간은 우둔함이나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평생 동안 그러한 능력을 전혀 갖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즉, 모든 인간이 폭력과 억압이 아닌, 상호 간의 선의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를 갈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 속에서 삶이 더욱 편리해질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얻게 되는 편리함이 훨씬 크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공포가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의 본성은 연대보다는 지배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훨씬 더 강하다. 그러므로 인간 사이의 지속적인 유대의 기원은 쌍방적인 선의가 아니라, 쌍방적인 공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자연은 인간에게 사회적 연대를 추구하는 본성을 심어주지 않았다. 자연은 오히려 인간을 분열시키고, “서로 침략하고 파괴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 때문에 인간은 오직 권력욕, 즉 타인의 권력을 차단하려는 욕망과 그 실천만이 자기 자신의 의존을 담보할 수 있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개인이 권력을 추구하게 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 (bellum omnium contra omnes)에 빠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각 개인이 발휘하는 최상의 주관적 합리성이 최악의 객관적, 사회적 비합리성을 낳은 상태가 곧 자연상태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성과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노동의 여지가 없다. 토지의 경작이나, 해상무역, 편리한 건물,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기계, 지표에 관한 지식, 시간의 계산도 없고, 예술이나 학문도 없으며 사회도 없다.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
이 구절은 특히 홉스의 “자연법론”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연법의 체계초월적 구속력, 다시 말해 자연법이 모든 법질서의 전제이자, 그 정당성의 근거라 파악하는 전통적인 자연법론에 따르자면, 자연법은 당연히 그 자체로서 구속력을 갖는 규범이어야 한다. 15장 마지막 단락을 “이러한 이성의 명령ㅇ르 사람들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적당한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명령은 무엇이 인간의 자기보존과 방어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에 관한 결론 또는 공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법이라는 것은 원래 권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자의 말이다. ” 홉스에게 자연법은 고유한 의미의 법률이 아니라, 이 자연법을 실현하기 위해 평화를 수립하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필연적 동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홉스에서는 주권적 자연권과 객관적 자연법 사이의 대립이나 긴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법은 규범적 구속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주관적 권리’를 규범적으로 더욱 강화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가 말하는 자연법이 규범이 아니라 자연적 필연성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박은정, “방법사적 관점에서 본 토마스 홉스의 자연법사상” 참고. 이에 반해 자연법의 규범력을 전제로 홉스의 법사상 전체를 전통적 의미의 자연법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리바이어던을 “안전국가 (Sicherheisstaat)” 로서의 법치국가로 파악하는 입장으로는 Werner Maihofer <법치국가와 인간의 존엄> (심재우 역) 심재우, “Thomas Hobbes의 법사상” <법사상과 민사법>
따라서 홉스로서는 이러한 직접적 형태의 자연은 통일된 질서를 확보해낼 수 없다. 물론 자연은 신의 명령으로서 “평화를 추구하라”로 (고 아닌가?) 요구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저 이성의 가르침 (dictate of reason) 일 뿐, 행위를 조종하는 법률이 아니다. 즉 자연법은 인간의 자연적 격정에 반하는 것이고, 격정은 개인들로 하여금 정의, 형평, 겸손, 보은보다는 편하성, 교만, 복수심으로 오도한다. 즉, 신이 창조한 세계인 자연 그 자체는 화합과 통일을 추구하며, 인간들에게 이 “잔혹하고 험악한 상태로부터 빠져나오라”고 강제한다. 그러나 이 자연 스스로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그 자연 자체로 말미암아 처하게 되는 가혹한 상태”의 원인이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갖고 있는 이성적 본성 때문에 자연상태에 빠지게 되고, -앞으로 살펴보듯이-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본성 덕분에 다시 자연상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직접적 본성에 비추어 볼 때에는 결코 사회를 형성할 능력이 없는 개인들이 어떻게 하나의 규범적 지붕 아래 결합할 수 있는가?
3. 리바이어던 - 국가주권의 탄생과 주권의 역설
자연상태를 극복한 문명화된 사회는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인공의 산물, 즉 자연을 모방하기는 하지만, 자연 속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인위의 산물. 그 결과가 곧 인공적인 정치적 육체 (political body- corpus politicus) 인 국가이다. 홉스는 결코 어떤 이상저긴 국가나 완벽한 헌법질서를 기획하여, 이를 기존의 국가와 대비시키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홉스는 국가설립을 위해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활동이 이미 수행되었고, 다만 국가형성과 관련하여 아직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은 메커니즘 자체를 재구성하여 사회적 통일성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밝혀서 무지와 착각으로 인해 공동생활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깨우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법적 의도는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근간을 이룬다. 즉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국가 상태 최소한의 단위로 해체하여, 그 최손단위가 결국 “개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개인들로만 구성된 상태가 과연 어떤 모습일 것인지를 역추론하여, 이로부터 최소단위가 결합된 국가 상태의 규범적 의미를 재구성한다. 이러한 해체적 분석적 (resolutiv- analytisch) 방법론에 관해서는 Wolfgang Kersting, Die politische Philosophie des Geselllschaftsvertrags, 1994.
홉스에 의하면 모든 국가는 그 구조상 자연법을 간접적으로 실현한다. (그럼 국가가 실현하는 건 전통적 자연법인건가. 국가가 필요로 되는 논리적 이유는 홉스적 자연때문이고? )평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매개체인 이성 자체만으로는 자연법이 명령하는 평화를 보장하기에는 너무 박약하다. 즉, 이성이 그런 격정을 억제하라는 단순한 도덕적 호소만을 일삼는 한, 이성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이 가장 강렬한 격정, 즉 죽음에 대한 공포와 결합하게 되면, 이서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홉스에 논증에 나타난, 이성과 공포의 미묘한 결합에 관해서는 Leo Strauss (뭐짓? 스펠링이 틀린 거죠?) Naturrecht und geschichte
동일한 목적을 향해 그저 다수인의 의사가 합치하는 것만으로는 평화를 유지하고 안전을 확보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 홉스는 말한다. 단순한 계약을 통해 이뤄진 결합은 언제나 개인들 사이에서 체결된 다수의 개별계약일 뿐이어서, 기껏해야 다수의 계약들의 산술적 총합일 뿐, 결코 완결된 “총체성”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합관계는 개인들의 의지에 종속되며, 따라서 안정성을 갖지 못한다. 개별로부터 독립된 보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상태의 지속에 해당. 개인과는 별도로 또는 개인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보편적 권력”을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개인들의 권력과 힘을 한 사람 또는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합의체에 이양하는 것이다.
Obligatio mutua 상호 책임 mutual covenant one with antoehr 상호간 수평 결합.
리바이어던이 비로소 자연이 생산할 수 없는 것, 즉 질서를 창출하며, 질서는 바로 계약당사자들이 자신들의 권리주체성을 포기하는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하다. 최고의 중앙권력. 모든 인간들 행동 동시에 조종. 평화와 안전의 보장자. 적절한 수단과 조해요소 심판 최고의 법관. 규칙 제정.
“주권자는 백성 각자가 동료 백성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누릴 수 있는 재산이 무엇이며, 할 수 있는 활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지고 있따. 그 규칙이 바로 사람들이 소유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자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다시 말해 주권자보다 앞서있는 소유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홉스는 전통적인 자연법적 구속으로부터 주권을 완전 해방시키면서, 주권이 비로소 소유권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본다.
홉스와 같이 주권의 절대성을 전제하는 한, 만일 주권에 대한 구속과 제한을 문제 삼게 되면 곧바로 역설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홉스는 철두철미 지배제한계약이 아니라 지배설립계약으로 사회계약을 구성함으로써 이러한 역설을 사전에 봉쇄하거나 은폐한다. 이 주권의 역설 Paradox der Souveränität 의 문제성에 관해서는 Niklas Luhmann… “Staat und Staaträtson im Übersetzung, 2002” 아감멘의 철학적 출발점에 관해서는 윤재왕, “포섭과 배제- 새로운 법개념? 아감멘 읽기 1” 참고 두 가지 개념적 구별에 관해서는 Wolfgag Kersting, “Thomas Hobbes Leviathan” Geschichte des politischen Denkens, 2007 주권 자체가 모든 계약과 법률이 기능하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주권이 신민에게 가하는 어떠한 해악도 불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법이다. 어느 누구도 주권자에게 저항할 수 없다. 주권자인 리바이어던을 벗어나서는 어떠한 통일성과 보편성의 영역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 점에서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자기 스스로 움직이는 평화의 기계 Friedenmaschine 로서 그 자체만으로 완결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물론 절대주권에 대한 홉스의 이러한 구상은 그의 국가이론 전체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커다란 딜레마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의 이론적 출발점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휘말려 들어가는 자기모순이다. 즉, 인간이 모든 것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성의 지침에 따라 자기보존을 위해 이 모든 것에 대한 권리의 행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양 극단 사이의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다. 코젤렉은 이를 심지어 “논리적” 모순이라고까지 표현한다. Reinhard Koselleck, Kritik und Krise. 홉스는 리바이어던이라는 기계를 만들어 이러한 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연법의 실현을 보장하는 것이 곧 리바이어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홉스에게 국가는 이성의 실현이며, 이성은 인간본성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결국 국가는 인공적 우회로를 거쳐 다시 자기 스스로에게 되돌아 온 이성, 즉 인간본성의 표현이다. 이 점에서 홉스는 자연법과 시민법은 상호 포함관계에 있으며 그 범위 또한 같다고 말한다.
저항권 없다.
다른 한편 홉스는 법률개념을 전적으로 주권자의 의지에 국한시킴으로써 국가 이전의 또는 국가를 초월한 법은 완전히 “무용한 법(ius inutile)”으로 전락시켰다. 코젤렉의 표현을 빌리자면 홉스의 국가철학에서 자연법은 법적-정치적 과정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리바이어던 국가에서는 오로지 입법자의 권위에 기초하여 내려진 명력적 처분만이 법으로서 효력을 가지며, 일정한 처분이 내려졌다는 형식적 사실 자체만으로 모든 사람은 여기에 복종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홉스를 근대적 법실증주의의 원조로 이해하는 칼 슈미트의 해석은 타당성을 갖는다. Carl Schmitt, Leviathan in der Staatsrechtslehre des Thomas Hobbes. 법은 주권자가 법으로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 (non veritas, sed auctoritas facit legem) 리바이어던에 의해 만들어진 법적, 정치적 공간 속에서는 국가에 의해 제정된 규범에 저항할 수 잇는 적당한 근거가 자리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전통적 자연법에 대한 “자연법적 말살”이라고 불러도 좋을 홉스의 국가사상과 법사상에 비춰 볼 때, 홉스를 근대 자유주의의 원조로 평가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특히 홉스를 소유적 개인주의 possessive individualism 의 관점에서 시민적 자유주의의 시원으로 보는 C.B. Macpherson 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Hobbes to Locke (황경식/ 강유원 공역,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홉스는 사회화 이전의 원자화된 개인을 국가 형성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분명 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법과 국가질서를 연역하는 전과정은 그 출발점을 완전히 뛰어 넘어버리는 독자적인 역동성을 발휘한다. 즉, 평화를 보장하는 사회적, 정치적 통일성을 형성하기 위한 수단인 국가는 그 근원이 되는 주체를 압도하는 독립성을 획득하고, 그럼으로서 연역적 추론의 시발점이었던 개인주의와 도저히 화합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관계에 서있게 된다. 물론 이러한 독립성과 독자성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국가는 아나키를 억제하고 통일성과 보편성을 보장할 수 있을 때에만 지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결코 독립된 실체 Substanz 가 아니라 특정한 기능 Funktion으로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의 연원으로서의 개인과 국가 자체가 갖는 정당성 Geltung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나 법치국가 이론 또는 자연법적 파토스로 홉스 철학을 재구성하여 양 극단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성공하지 못할 정도로 그 심연은 깊고도 험난하다.
이렇게 온갖 긴장과 외견상의 모순으로 가득 찬 건축물인 리바이어던은 그 진면목을 어느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다. 리바이어던은 권위적이지만, 고전적 절대주의의 특성인 복지국가로서의 특성도 갖고 있다. 후견적 배려와 분배적 정의를 통해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대립이 극단적 반복으로 치닫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 역시 리바이어던의 과제이다. (나태 예방 부 편중 방지, 리바이어던 제 30장 430)이 점에서 홉스는 분명 절대주의 이론가이다.
이와 동시에 리바이어던은 전통적 자연법적 정당성에서 벗어나, 오로지 새로운 시민적 자연법에 기초하고 있는 국가이다. 이 시민적 자연법은 신에 의해 영구불변의 질서로 고정되어 있는 절대적 규범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사슬에서 풀려나 독존자 idiotes 로 삶을 영위하는 개인들의 활동에 근거한다.
이 점에서 홉스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분명하게 국가를 천상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려, 종교와 같은 상부구조가 아니라, 토대 자체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최초의 사상가이다. 그래서 국가의 탈신비화 Entzauberung des Staates (disenchantment) 는 비로소 홉스에 의해 완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적어도 이 점에서 홉스는 국가실체론자나 국가주의자 Etatismus 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기계로서의 국가, 도구로서의 국가가 다시 부품과 도구로 이용하는 법률은 어떠한 속성을 갖고 있는가?
4. 시민법과 진리
홉스는 자연법과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시민법(civil law)이란 “모든 백성들이 선악의 구별, 즉 무엇이 규칙에 위배되고 무엇이 규칙에 위배되지 않는가를 구별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말, 문서 기타 의지를 나타내기에 충분한 표지를 통해 국가가 명령한 규칙들이다.” (348) “행위의 선악에 대한 척도는 명백히 시민법이다.” (416) “국가에서 자연법의 해석은 도덕철학 책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저작자들의 견해가 아무리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권위만으로는, 즉 국가의 권위 없이는 그것이 법이 될 수 없다.”(360)
홉스는 훗날의 칼슈미트나 한스 켈젠과 마찬가지로 법률의 개념에 어떤 실질적인 정당성기준을 수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 Carl Schmitt, Berfassungslehre, 1993. 법치국가적 법률개념과 정치적 법률개념을 대비시키면서, 전자가 “정당성, 합리성, 정의 등 특정한 속성을 갖는 규범임에 반해”, 후자는 주권자의 구체적 의지와 명령 및 활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슈미트에게는 후자의 정치적 법률개념이 더욱 근원적이다. 그의 “정치신학”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보여주듯이, “주권자는 예외상태에 대해 결단을 내리는자” (Politische Theologie, 9. Aufl) 적어도 형식적 측면만을 본다면 슈미트의 정치적 법률개념은 홉스의 법률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Hans Kelsen, Reine Rechtslehre, 1960. 물론 켈젠의 경우에는 오로지 법개념의 차원에서만 실질적 정당성을 배제할 뿐이다. 다시 말해 법개념의 차원에서는 형식성을 유지하면서, 법률의 구속력, 즉 그 효력의 차원에서는 각 개인의 도덕적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 켈젠의 법실증주의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이 복합성에 관해서는 Zai-wang yoon, Rechtsgeltung und Anerkennung, Probleme der Anerkennungstheone am Beispiel voen Ernst Rudolf Bierling, 2009.
”그리고 정의는 과학적 인식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켈젠처럼 홉스 역시 자연법이나 신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고, 이러한 합의에 근거하여 시민법의 내용을 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심지어 홉스는 국가의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국가에게 해악이 된다고 느꼈다.
“주권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면, 오늘날 백성들의 복종을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주권자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정당화는 불필요하다.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도 성공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조장하여 반란을 꿈꾸는 야심가들을 양산할 뿐이다. 정복자가 사람들의 미래의 행위에 대해 항복을 받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자신의 과거의 전쟁행위를 사람들로부터 승인받으려고 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국가의 죽음을 초래하는 치명적 화근의 하나이다. 양심에 비추어 그 시작이 정당화될 수 있는 국가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홉스의 법률개념은 정당성이나 정의로부터 중립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과연 홉스가 실정법률 이외에 실정법률의 정당성 또는 부정당성을 확신할 수 있는 제 3의 규칙을 인정할 여지를 남겨놓았는지를 더 자세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실정법에 표현된 정당성보다 더 고차원의 또는 그와는 구별되는 어떤 다른 정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실정법 자체만이 정당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며, 법률개념만으로 이미 정당성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법률의 필연성
자연법으로부터 시민법으로
시민법은 인간이 만든 법률. 시민은 선악을 구별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기 위해 법률을 필요로 한다. 시민은 결코 스스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할 능력이 없다.
이로써 자연법과 신법 뿐만 아니라, 개인 또한 시민법의 정당성을 확인 할 수 있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 맥락에서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행위는 죄악이다”(416) 와 같은 ‘선동적인 학설의 해악’은 국가를 파괴하고 멸망케 하는 원인이라고 단정한다.
하필이면 왜 법률만이 시민들에게 선악의 구별을 가르쳐주고, 그들의 행동을 위한 지침으로 작용할 수 잇는 것일까? 더욱이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그 자연적 본성에 비추어 결코 다른 사람ㅇ르 지배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이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측면에서 평등하도록 창조했다. 간혹 육체적 능력이 남보다 더 강한 사람도 있고, 정신적 능력이 남보다 더 뛰어난 경우도 있지만, 양쪽을 모두 합하여 평가한다면, 인간들 사이에 능력 차이는 거의 없다. 있더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이익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크지는 않다.” (168) 그러므로 홉스가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을 취했다는 흔한 설명 (오세혁, 법철학사 2008, 123면) 은 근거가 없다. 아 근데 성악설이랑 평등설이랑 왜 양립불가인지 모르겠다?
이에 대한 홉스의 답은 아주 간단하다. 즉, 법률이 없으면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으며, 계약의 불이행을 처벌하고, 계약을 통해 성립된 소유권을 보호해주는 강제 권력이 성립하기 이전에는 정의와 불의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합의와 법률이 확립되기 전에는 인간에게는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정의나 불의, 보편적인 선과 보편적인 악에 관한 본질적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Vom Menschenm, Kap, 10 nr. 5) 그러므로 법률 자체가 곧 모든 정의의 근원이며, 그 자체로 이미 불의가 도리 수 없다.
이미 “실낙원”, 모든 법률 폐지, 인간의 자기 책임 자유롭게 발산, 자유로운 시장 조화로운 이익 조정, 사회 비폭력적 구성? 홉스는 이런 낙관적 가능성 철저히 거부. “인간은 그들 모두를 위압하는 공통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에 들어가게 된다.”(171)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라거나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혼자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홉스는 성경의 낙원이 자연상태가 아니라 시민상태라고 한다. 신의 금지 명령이라는 법률 존재.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고독하다. 자기 보존 자기는 연명과 생존이 아니라, 이미 권력, 명예, 존엄, 경제적 부를 포괄하는 의미이다. 따라서 자기보존권은 든 인간이 든 것에 대해 갖고 있는 권리이며, 심지어 다른 사람의 신체에 대해서까지도 권리를 갖는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나 이 세상의 든 것을 요구할 있는 권리를 가지며, 이러한 권리는 정당할 뿐만 아니라, 자연법적 근거까지도 갖추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든 사람은 든 사람에 대해 자연적인 적이다.
하지만 홉스는 이와 같은 권리포기계약에 머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약 자체 만으로는 결코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계약은 인간의 공동생활이 가능하고 정의가 보장되기 위한 조건이며, 이 점에서 계약은 인간이 자연상태를 벗 어나 시민상태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 관문의 열쇠가 단단히 채워지지 않는 한, 평화와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며 여전히 만인의 만인에 대 한 전쟁상태가 지배한다. “전쟁이라는 것은 싸움 혹은 전투행위의 존재유무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 전투의 의지가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기간 동안은 전쟁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171) 물론 홉스는 계약의 준수(pacta sunt servanda) 역시 자연법에 해당한다고 보지만, 계약준수는 결코 자기보존에 대한 자 연권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법률이 아니기 때문에, 계약준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떠한 안정성도 확보되지 않는다. “채무의 선이 행자는 상대방이 나중에 이행할 것이라는 보증을 받을 수가 없다. 강제적 힘에 대 한 공포가 없으면 말로 이루어진 약정은 인간의 야심, 탐욕, 분노 및 다른 정념을 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186) 왜 그러는가? 홉스는 계약을 ‘내가 준만큼, 너도 준다(do-ut-des)’는 쌍무적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약 자체만으로는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든 것에 대한 권리를 폐기하지 못한다. 계약은 오히려 그러한 권리를 다시 확인할 뿐이다. 다시 말해 계약에서는 든 사람이 든 것에 대해 가 지고 있는 자연적 권리를 처분할 의도가 표출되어 있다. 따라서 국가설립계약이 아니라, 단순히 쌍무적 계약만이 있는 상태는 여전히 만인이 자연적 평등을 누리는 조건 하에 있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일 뿐이다.
국가법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각자가 지닌 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또는 다수의 사람들의 합의체에 이양하고 ... 그럼으로써 개개인의 의지를 그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개개인의 다양한 판단들을 그의 단 하나 의 판단에 위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한 사람 또는 그 합의체의 행위가 마치 개개 인의 행위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232) 따라서 각자는 다른 든 각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해야 한다. “나는 나 스스로를 다스리는 권리를 이 사람 또는 이 합 의체에 완전히 양도할 것을 승인한다. 단 그대도 그대의 권리를 양도하여 그의 활 동을 승인한다는 조건 아래.” 여기서 말하는 권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각 개인이 무 엇이든할수있는, 든것에대한권리를뜻한다. Peter Cornelius Mayor- Tasch, Hobbes und das Widerstandsrecht, 1965, 이 구절의 의미를 ‘저항의 포기’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문언에 반하는 해석이다. 더욱이 각 개인은 모든 것에 대한 자연적 권리가 이양 가능하고 실제로 이양될 때에만 비로소 저항을 포기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저항의 포기는 자연적 권리를 이양한 데 따른 결과이지, 그 반대로 저항을 포기한 결과 자연적 권리를 이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자가 자발적 복종을 포함하여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든 것에 대한 권리에 대해 ‘자연적’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연적, 본성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사실상 의 복종을 요구할 자연권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자연권을 지배할 수 있는 자연권은 존재하지 않으며, 당연히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자연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자연‘권’은 권리가 아니다. 그에 대응되는 의무가 없 기 때문이다. 결국 각자가 든 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연적 권리가 지배자에게 일방적으로 이양됨으로써 비로소 그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권리가 지배자 에게 귀속된다. 다시 말해 근원적인 계약은 든 계약당사자들을 위해 하나의 공동 의 정부를 임명하는 것을 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계약을 통해 임명된 정부는 언제든지 다시 소환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고, 이러한 소환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이미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가 되기 때문에, 홉스는 각자의 권리를 지배자에게 이양하자는 시민들 상호간의 계약과 이러한 권리의 이양 자체를 구별한다. 그리하여 시민들 상호간의 계약은 쌍무적 계약관계, 즉 쌍방적 권리-의무 관계인 반면, 권리의 이양은 일방적이고, 근원적인 권리처분행위로서, 이로부터 지배자에게는 - 적어도 시민들과의 관계에서는 오로지 권리만이 성립할 뿐, 의무가 성립하지 않으며, 거꾸로 시민에게는 오로지 의무만이 성립할 뿐, 권리가 성립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배자가 불법을 행할 가능성 또한 배제된다. 그러므로 시민이 설령 사실상으로는 지배자를 소환하거나 폐위할 힘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지배자에 대항하여 어떤 권리를 원 할 수는 없게 된다. 이러한 지배자가 권좌에 올라섬으로써 “영원불멸의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인간에게 평화와 방위를 보장하는 지상의 신”인 리바이어던이 탄생하게 된다. 즉, 자연상태의 인간들 자신이 스스로를 후견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만들게 됨으로써 지상의 신이 탄생한다. 이 점에서 권리의 이 양을 내 으로 하는 계약은 지배설정계약이지, 결코 지배제한계약이 아니라는 앞에서의 지적이 타당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권리를 이양한 이후 피재배 자인 개인들은 어떠한 권리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지배자가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홉스로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하긴 하지만, 군주의 나쁜 행동은 단지 법으로서 구속력을 갖지 않는 자연법에 위반될 뿐이라는 것이 홉스의 결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냉철한 논증을 홉스 스스로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지배자가 자연법을 위반하여 비이성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비이성적인 행동은 자기보존이라는 명령에 반하는 것이며, “주권자의 행복과 인민의 행복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약한 백성을 거느리는 자는 약한 주권자이다.”(446) 결국 주권자가 사회계약의 적에 반하여 시민을 공 하는 것은 결코 “불법”은 아니지만, 그러한 행동은 주권자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왜 인간은 인간이 만든 법에 복종하게 되는지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 셈이다. 즉, 법에 복종하는 이유는 자기보존과 평화 그리고 안전이라는 명령이며, 평화와 안전은 오로지 법률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과연 홉스가 실정법률 이 외에 이 법률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또 다른 실정규칙을 인정하고 있는지를 물어볼 수 있다. 홉스의 전체 이론적 구상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실정법을 벗어나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음을 홉스 역시 인정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평화와 안전은 어떠한 경우에도 최소한 한 가지는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인간의 ‘생명’이다. 이 맥락에서 홉스는 “모든 해악 가운데 제1의 해악은 죽음이다”라고 말한다. 죽음에 비하면 자연상태나 심지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도 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한다면 생명은 법률에 대해서도 일정한 제한을 가하고, 법률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있어 야 한다. 하지만 홉스의 이론을 섬세히 관찰해 보면, 생명이라는 전제의 절대성은 옳을지 몰라도, 그로부터 법률의 제한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법률은 오로지 근원적인 계약을 기초해서만 성립하며, 따라서 이 계약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시민이 아니라,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따라서 그와 같이 계약당사자가 아닌 사람에 대해서는 법률이 효력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개념적으로 법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어떠한 보호의 대상도 아니며, 단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에 있을 뿐이다. 근원적 계약의 범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누군가 자연권을 이양하지 않는 한, 그에게는 법률이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어떠한 사람도 지배자 에게 자기방어에 대한 근원적 권리를 이양하지는 않는다. “폭력에 대한 자기방어의 권리를 포기하는 계약이 폭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이 계약은 언제나 무효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 상해, 투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를 양도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190) 그러므로 한 사람에게 전쟁에 병사로서 나가 죽으라거나 살 인자로서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을 감수하라고 의무지우는 “법률”은 무효일 뿐만 아니라, 이미 개념적으로 그와 같은 법률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확실히 개인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는 부분이긴 했지) 같은 맥락에서 홉스는 “눈앞에 닥친 죽음의 위협 때문에 위법행위를 하게 된 경우, 그는 완전히 면죄된다. 왜냐하면 그 어떤 법도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보존을 포기하도록 의무를 부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391) 그리고 누군가가 만일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린다면, 마치 시체가 인간이 아니듯이 그러한 말은 “법률”이 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살인자나 다른 무고한 시민들을 죽일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리바이어던이 갖고 있는 절대적 주권은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홉스는 자기보존권을 이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더욱 섬세하게 구성한다. “‘이러이러한 경우에, 나를 죽이라’고 계약을 맺을 수는 있지만, ‘이러저러한 경우에, 나는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할 때 결 코 저항하지 않겠다’고 계약을 맺을 수는 없다.”(191) 다시 말해 국가가 자기방어권을 배제하는 법률을 공포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반항을 이겨내고 사람을 죽일 권리는 얼마든지 갖고 있다는 뜻이다.
과연 구체적인 상황에서 국가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사할 것인지 여부 및 그 정당성 여부는 전적으로 국 가가 장악하고 있는 노골적 폭력 - 그리고 이 폭력은 개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심판 관으로 정립한 국가폭력이다 - 에 따른 결정대상이다. 이에 반해 벨첼은 홉스가 한편으로는 시민들이 복종계약을 통해 사전에 국가의 모든 활동에 동의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방어권을 포기하는 것은 무효라고 함으로써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Hans Welzel, Naturrecht und materiale Gerechtigkeit, 4. 1980) 그러나 이 비판은 텍스트를 자세히 읽지 않은 데 기인한다. 자기방어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헌법제도를 초월하는 자연법적 저항권을 도출하거나, 시민법 역시 자연법에 구속된다고 홉스를 읽는 방식 또한 벨첼과 유사한 “창조적 오독 creative misleading” 을 범하고 있다. 다만 홉스가 보존해야 할 “자기”의 발현을 감안하여 몇 가지 실질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 말라는 명령, 신을 경배하라는 명령은 주권적 지배자일지 라도 폐기할 수 없다. 과연 이러한 명령이 개인의 생존과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 에 대해서는 홉스 자신도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어쨌든 홉스는 “국가가 설립 되기 이전에도 신의 지배를 인정하는 어느 누구일지라도 신에 대한 경배를 거부할 권리는 없으며, 따라서 신을 거부하라는 명령을 내릴 권리가 국가에게 이양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60) 신을 믿을 것인지 여부는 시민법의 규율대상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사실상의 폭력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법률의 규율대상은 될 수 없다. 시민의 내면은 결코 리바이어던의 지배가 미칠 수 없는 영역이다. 만일 그러 한 강제가 행해진다면 그것은 법률의 형태를 갖출지라도 단순한 폭력에 불과하다. 끝으로 근원적인 계약에 기초하여 제정된 법률이 그 실효성을 상실한 때에, 다시 말해 지배자가 사실상 더 이상 안전과 평화를 보장할 수 없거나 근원적 계약이 폐기되었다면, 근원적인 계약이 폐기될 가능성을 홉스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모든 시민이 동시에 그리고 예외 없이 최고의 국가권력에 Von Burger, Kap. nr 20.), 가사의 신 리바이어던은 죽은 것이며, 이 경우에는 다시 든 사람이 명령을 할 수 있고 동시에 어느 누구도 명령을 내릴 수 없는 극단적인 카오스로서의 자연상태가 도래하며, 이 상태에서는 법률이란 존재할 수 없다.
2. 법률의 절대성과 완결성
칼 슈미트 홉스연구의 고전에 속하는 저작, <토마스 홉스의 국가론에서의 리바이어던. 하나의 정치적 상징이 갖는 의미와 오류 (1938)>에서 홉스가 말하는 시민상태에서 저항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홉스의 절대국가에서는) 저항권 - 그것이 객관적 법이든 아니면 주관적 권리이든 관계없이 - 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어떠한 실마리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 이 국가는 현실로 존재하는 한, 평화, 안전, 그리고 질서를 보장하는, 저항불능의 도구로서 기능하며, 그렇다면 이 국가는 모든 객관적 법과 모든 주관적 권리를 제 손 안에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 국가는
유일한 최상위의 입법자로서 모든 법을 스스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국가가 현실로 존재하지 않고, 평화보장이라는 기능을 이행하지 않으면, 다시 자연상태가 지배하고 더 이상 국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62)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한편으로는 강력한 절대주의의 상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쇠락을 부추기는 자유주의 법치국가의 맹아로 해석하는 칼 슈미트의 입장이 과연 타당한 홉스 해석인지 여부는 일단 접어둔다면, 적어도 리바이어던 국가에서 주권자와 법 그리고 저항의 의미에 관한 슈미트의 이 해석은 텍스트에 실한 독해방식이다. 물론 홉스 스스로도 국가가 결코 영원하다거나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홉스는 국가의 유한성이라는 문제를 바로 이 유한성의 논리로 해결한다. 다시 말해 국가가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에 빠지면, 그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물론 평화, 질서, 안전을 오로지 사실상의 권력과 일치되는 것으로 보게 되면, 과연 그러한 “국가”도 국가라고 할 수 있는지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있다. 사실상의 물리적 권력은 오히려 평화, 질서, 안전을 파괴하며, 따라서 “독재란 그저 사회적 무정부상태의 정치적 발현 형태일 뿐이다”63)라는 식으로 안전국가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에 관한 그러한 존재론적 물음이나 메타차원의 물음은 리바이어던에 대한 해석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홉스는 평화의 존재와 법률의 존재를 동일시한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평화는 오로지 현세의 평화이다. 홉스에게 평화는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선이기 때문에, 시민법만이 인간에게 무엇이 선 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논리적 필연성을 갖는다. 설령 실정법이 자연법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시민상태를 지배하는 법은 오로지 실정법일 뿐이다. 홉스의 법률개념을 굳이 칸트식으로 표현하자면, “자연법 없는 시민법은 공허하고, 시민법 없는 자연법은 맹목이다”라고 할 수도 있다. 단, 자연법이 실정법에 법률적 구속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어쨌든 유한성을 숙명으로 하는 국가의 존재 여부가 법률을 통한 질서기능의 이행 여부에 달려 있다면, 결과적으로 리바이어던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리바이어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정당하고 구속력을 갖는다. 따라서 법률은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정당성 근거이며, 그 밖의 다른 정당성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 해 법률과 정당성은 일치한다. 그리하여 시민들이 절대적 지배자에게 저항하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한 법률이 정당하다고 깨닫는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법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 된다. 물론 시민들이 이 당연한 사실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시 자연상태로 후퇴하게 된다. 홉스에 따르면 그의 법률개념에 속하는 든 법률은 정당하며, 모든 주권자가 제정한 실정법은 두 그의 법률개념에 속하기 때문에 든 실정법은 정당하고 구속력이 있다.
법률의 연원은 인간이고, 법률은 이미 개념적으로 정당하다는 사실은 곧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자는 - 그것이 절대군주이든, 아니면 의회와 같은 합의체이든 - 이미 개념적으로 오로지 정당한 법률만을 제정할 수 있을 뿐임을 뜻한다. The facts that origin of the laws is human and that the laws are conceptually legitimate means that the law makers - whether it is monarch, or the committee like congress - conceptually can only enact laws that are just. (understanding the concept matters.)그래서 입법자가 제정한 모든 법률은 언제나 정당하다. 물론 입법자가 자연적 인간으로서는 악할 수도 있겠지만, 입법자로서는 언제나 정당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즉, 입법자로서 의 든 행동은 언제나 정당하다. 그러므로 입법자가 입법자로서 평화를 보장한다는 자신의 과제를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원용 하면서 말을 내뱉는 한, 그의 말은 언제나 정당하다. 결국 홉스의 법률개념은 그때그때의 구체적인 현세의 권력자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해석 이외의 다른 해석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지 않다.
5. 결론
인간 사이의 만 은 언제나 이중의 우연성(doppelte Kontingenz)에 지배당한다. ‘나’는 ‘너’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예견할 수 없으며, ‘너’ 또한 ‘나’의 행동을 예견할 수 없으며, ‘나’와 ‘너’ 두 각자가 그러한 예견불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우연성은 복잡성을 낳고, 복잡성을 축소하기 위해 질서를 구상하는 것이 곧 사회이다. “어떻게 사회적 질서가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이와 같은 우연성 그리고 그에 따른 복잡성의 감축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 게임이론?)의 흔적이다. 그 이전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와 평등을 무제한적으로 요구하는 변혁의 시대에 살고 있던 홉스는 일단 그러한 자유와 평등의 근거를 자연권이라는 개념으로 집약하면서, 자연법을 통해 곧바로 자연권의 효력을 박탈하는 이론구성을 통해 이 질서의 물음에 대답하고자 했다. 이미 급 한 사회변화로 인해인간을 사회질서의 기초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점은 자명한 것이었지만, 내전이라는 극한적 상황을 체험하면서 홉스는 인간을 최대한 부정적으로, 다시 말해 이기적이고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그와 같은 인간의 조건(conditio humana)에 적합한 질서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모든 질서의 출발점은 인간이며, 그것도 특정한 신분에 국한된 인간이 아니라, “모든” 개인이다. 자연적인 인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홉스의 이론적 출발점은 철두철미 개인이고, 이 점에서 그는 개인주의자이다. 그리고 이 개인주의는 인간들 사이의 결합으로서의 “계약”과 주권자에 대한 “권리이양”이라는 의지 의 발현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의 표출을 통해 만들어진 국가 및 국가 의 법률은 개인이 갖고 있는 개인성 거의 모두를 용해시켜 버리는 거대한 용광로이다. 개인들의 의지는 특정한 지점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는 독립된 절대적 존재로 우뚝 솟아오른 리바이어던 속에서 해소된다. 그래서 홉스가 설계한 건축 물의 현판은 “개인주의적 절대주의”이다. 형용의 모순처럼 느껴지는 이 표현만큼 홉스의 국가철학과 법철학을 적절히 규정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이 있을까? 적어도 텍스트 자체와의 근접성을 최대한 유지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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