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생존자의 다짐.
출처 : http://m.business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071
이 글에서 문화라고 함은 각자 일상적으로 쓰는 의미의 문화이다. 일상적 의미의 문화가 각자 조금씩 다르다고 하여도, 그 차이가 논의를 크게 바꾸는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그 자체로서는 가치중립적이라고 정의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문화란 곧 인류가 일군 좋은 습관 및 생활 방식만을 의미한다, 고로 강간 문화는 문화가 아니다’라는 식의 주장(http://jabo.co.kr/sub_read.html?uid=34148 )은 논외로 하겠다. 이는 “좋은” 혹은 올바름에 대한 인식 역시 문화의 영향력 하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개별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실천하는 상징 체계 혹은 습관 정도의 것이다. 이런 문화에는 “좋은” 문화도, “나쁜” 문화도 있으며, 이런 좋음과 나쁨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규정된다.
개별 인간들은 사회에 속해있는 한,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이는 모든 개인이 어떠한 문화로부터 같은 방식으로 또는 같은 정도로 영향을 받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문화의 영향력 정도나 방식의 차이는 문화의 존재의 유무를 판별한 근거로서 기능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강간문화*는 개인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정도로 영향을 미친다. 이 개념에 대해 한 남성은 강간문화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로서 “나는 강간한 적이 없음”을 제시할 수 있다. 이는 특정 사건에 한하여 개인적 차원에서의 책임의 유무를 가리는 데에는 유의미한 주장이나, 문화 자체의 존재 여부 혹은 그의 영향력 수준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다. 한 여성의 “나는 강간당한 적이 없다”의 주장도 동일한 수준의 효력과 한계를 가진다.
반대로, “나는 강간범으로 오해받을까봐 여성과 단둘이 엘레베이터에 타는 상황을 피한다.”라고 고백하는 남성과, “나는 혹여 강간당할까봐 짧은 치마를 입지 않고, 밤에 거리를 나가지 않고, 술 마시길 꺼린다.”라고 고백하는 여성은, 비록 집적적으로 강간 행위와 관련이 있지는 않지만, 사회적인 관습으로서의 강간을 인지하고, 강간과 연관되는 상징에 대해 피하는 방식의 행위로, 자신의 기존 행위에 변화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강간문화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이 더 큰 수준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이 둘은 강간문화의 피해자라는 점에선 동일하다.
이에 비해, “원래 여자란 싫다고 해도 내 큰 자지 맛을 보면 좋아하게 되어있다”라는 생각이나, “저 여잔 저런 화장을 하니까 지도 바랐던 게지”라는 발언등은 역시나 직접적 강간행위와는 관련이 없지만, 강간문화 형성에 가담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고로 강간문화는 실제 강간을 한 이와 강간을 당한 이를 넘어서는 사람들을 포함할 때에만 비로소 정의될 수 있다.
강남역에서 여성혐오범죄가 발생한 이후, 여성들은 “난 번호 안 줬다고 여고생 집 앞에 찾아와 폭행했단 기사를 보고 번호 묻는 남자들마다 다 번호줬다.” (https://www.instagram.com/p/BFjnEQ3Bm6b/?taken-by=bell0327 )“화장실 갈 때도 살해당할까봐 걱정해야하느냐”라며 등등의 공포를 보다 적극적으로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건 가해 혐의자의 범행 동기로 보아, 자신 역시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서로의 안전을 걱정하며 문화적으로 해당 행위와 회피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제약하고, 남성들은 남성기를 가졌음에도 “충분히 남성적”이지 못 한 다른 남성을 교정하려고 한다. 형태상의 차이는 있지만 이 둘 모두 “여성혐오문화”를 형성 및 유지하는 길이다.
특정 문화를 만드는 이들은 특정 행위나 사고의 사회적 지배력때문에, 자신의 행동이나 사고를 바꾸는 모든 개인들이다.
특정 성별의 개인이 자신의 문화와 매 순간 일관적으로 동일한 수준의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아니지만, 특정 성별이 성별을 기준으로한 문화에 영향을 받는 경향이란 성별을 기준으로하여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경향은, 성별 집단의 수가 비슷할 경우, 해당 문화에 대한 이득을 보는 집단의 시각이나 입장이 피해를 보는 집단에게, 실질적 피해 규모와는 대체로 무관하게, 어느 수준 납득되고 용인될 시에만 유지되기 때문에, 특정 경향이 지배적으로 존재하는 한, 피해 집단이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담론을 내면화하고 있는 상태가 불가피하다. 이러한 사실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만연한 그릇된 주장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여성에 대한 멸시와 차별은 유구한 것이지만, 여성에 대한 시기 및 혐오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정서 및 반응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혐오가 그 이전의 멸시와 차별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여성의 경제적 수준에 대한 시기나 여성성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혐오의 정서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과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강남역에서 일어난 살해사건에 대하여 사람들은 문화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여성 혐오 문화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몇몇 언론사들은 해당 사건을 ‘묻지마 사건’으로 규정하고 싶어하지만, 누군가의 “묻지마”란 명령 자체는 오히려, “왜”란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왜 죽였냐'란 질문은 피해자가 ‘마땅히 그런 피해를 받을 만 했느냐’란 질문으로 소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왜”란 질문은 적극적으로, ‘누가 그녀를 죽였느냐’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질문이다. 피의자가 여성들이 무시해서, 아무 여성이라면 죽이고자 했다.라고 밝혔음에도 지속적으로 “묻지마”라고 명령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명령의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물음은 현-문화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현-문화에 대한 의심은 (미미한 수준이나마) 여성 개인이 직면하는 현실적, 물리적 폭력의 위험이 증대되고 가까워졌음 뜻함과 동시에, 사회적인 수준의 해결의 단초가 발생했다는 뜻이다.
강남역에서 일어난 여성혐오 범죄에 대해 사람들은 “문화”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는 일정부분, 그 어느 누구도 해당 정신(여성이라면 무조건 해하고 싶은)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이란 문화의 지배력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니라, 개인에게 필연적으로 일정 수준의 영향을 끼치는 문화를 문제 삼는 행위란 개인에 대한 단죄를 넘어 “사회”를 바꾸는 행위의 첫걸음이다. 개인적 단죄와 달리 문화를 문제시하는 행위는 해당 개인으로 하여금 타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매순간 염두 해야할 가능성으로서의 폭력을 "문제로 삼는" 행위이며, 이는 곧 변화를 마련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간 일방적으로 특정 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기반으로 다른 집단을 혐오 하고, (성)폭행을 했음에도, 해당 개인에게 죄를 묻는 그 이상의 행위들을 하지 않았다라면, 이번엔 그 해당 개인의 폭력 행위 이상의 문화에 대해 생존자들이 인지하고 사유하기 시작했다. 강남역에서 발생한 여성 혐오 범죄는 마땅히 여성 운동의 분기점이 될 조건을 갖추었다.
사회가 보다 노골적으로 “성별을 기준으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이는 ‘좋다, 나쁘다’란 잣대로 평가될 수도 있는 현상이지만, 그 이전에 이러한 양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적 변화를 위해선 피할 수 없는 과정의 일부이다. 개인적인 선호를 밝히자면 대체로 많은 사안에 관해서는 현상태 유지가, 본인이 진보에 가세하면 마땅히 투자해야할 여러 노력들과 그 결과의 불확실성을 고려한다면, 가장 우선시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선호는 현상태가 변화를 추구한다면 요구되는 노력과 불확실성들을 압도하는 정도로 위협적이라면, 어느 식으로든 변화를 담보하는 양분이란 경향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따라서, 개개인들의 선호는 사회적 상황에 귀속되며, 사회적 문제 해결의 유일한 과정의 유효성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간단하게 말하면, 모두가 각자 동등한 가치의 다른 생각을 가진 상황에서는 어떠한 판단도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 사회적 변화는 한 사안에 관하여 비슷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연합하여, 편이 확실히 갈려 싸워서, 한 쪽이 이길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해당 범죄를, 항상 해오던 대로 “묻지마” 사건, “화장실녀 사건”등으로 지칭하지 않고, “여성혐오범죄”로 인식하고 규정하는 행위는 따라서 상당히 고무적이다. 미국의 경우, 1984년 캘리포니아 주를 필두로 2016년 일리노이 주까지 총 45개의 주가 성적 지향에 관련된 범죄들을 여타 범죄와 구별되는 혐오범죄로 규정하고, 이에 대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판결과 대응을 하고 있다. 인식의 틀이란 현실이 존재한다고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적절한 대응은 더욱 더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사는 데 부모님이 한국인이란 이유만으로 살해를 당하는 일들은, 그 사건이 일어남과 동시에 “혐오범죄”란 명칭을 얻지 못했다. 사건들을 비교를 통해 분류하는 건 그에 대한 인식의 기초이다. 단 한 번도 문제라 생각해보지 않은 사안에 어떻게 대책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
여성주의 운동이 노동 운동과 접합 지점들이 없진 않다. 예컨대, 세월호 농성장에서의 폭식 사건, 전북 익산 테러 등, 주로 온라인에서 언어 폭력 위주로 성행하던 여성혐오, 노동혐오적인 담론들이 오프라인에서 물리적 폭력의 형태로 심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대한 시기심이 “김치녀”등의 이름으로 드러나고 있고,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 여성혐오 역시 경제적 문제와 무관할 수는 없겠지만, 여성혐오문화 그 자체를 곧 경제적 문제로 소급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으며, 가까이 다가온 위협, 사회에 만연한 공포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단 점에서 지양해야한다.
끝으로, 단지 여성이라는 그 이유로 살해당한 당신의 명복을 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이 땅에 앞으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간, 살해, 차별을 겪게 될 우리들은, 혹은 그런 일들을 겪을 것을 마땅히 항상 두려워해야만 하는 우리들은 이러한 현실을 인지하고, 또 할 수 있는 한 바꿔보겠다고 다짐한다. 여성혐오. 성별 간 갈등은 앞으로 더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그 전개된 형태는 비로서 우리에게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 강간문화 : “강간 문화란 강간이 만연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미디어나 대중 문화에서 용인되거나 정상으로 간주되는 환경을 뜻한다.”( https://www.marshall.edu/wcent…/sexual-assault/rape-cultu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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